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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절의 의미

  • 총회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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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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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절의 의미

안석수목사

*본문/ 10:22-27

 

성경의 내용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없는 기독교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조차 서슴없이 사랑의 종교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랑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밤마다 술에 만취되어 아내든 자식이든 닥치는 대로 구타하는 알콜 중독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말 말고 매를 맞으라고 엄마가 자식에게 말해야 할까요? 그리고 남편을 위해 날마다 술상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일까요? 여러분이라면 이와 같은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협박 공갈을 일삼는 폭력배, 부모마저 안중에 없는 패륜의 자식, 가족을 괴롭히는 알콜 중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안녕과 평안 그리고 행복을 고의로 파괴하고 짓밟는 사람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반드시 막고 질책하고 징벌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첫째, 사랑이란 방치나 방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이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미, 혹은 상대를 나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집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관심은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게 하려는 적극적인 보살핌이요, 마음씀입니다. 따라서 이 관심, 이 사랑을 지닌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방관하거나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릇된 길로부터 그를 건져 내기 위해 꾸짖지 않을 수 없고, 때론 그 길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둘째, 범죄를 자행하는 소수의 힘센 가해자보다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연약한 다수의 피해자를 구하고 보호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참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인 남편이 밤마다 술에 취해 식구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한다면 그 아내는 남편의 매도 견딜 수 있고, 모든 상황을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알고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해도 자식들은 아버지의 매를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의 얼굴만 보아도 공포에 질려 버릴 경우 아내가 자기 수준의 믿음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의 순교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능히 남편을 감당할 수 있다 할지라도 자식들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하여, 술독에 빠진 남편을 질책할 수 있어야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가로 막을 수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격리시키며, 더 심할 경우에는 법의 보호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내가, 남편과 그 남편이 마땅히 보호해야할 자녀들을 동시에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를 지닌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에 대한 질책을 당연시한다면, 대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질책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첫째, 믿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질책할 때의 잣대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지만,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질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상대가 내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났기에 자신에게 닥칠 해를 무릅쓰고 질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기가 다르므로 그 결과 또한 판이한 것입니다.

 

둘째,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를 질책할 정도로 상대의 잘못이 크기에 상대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소멸되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상대를 징벌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상대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질책하는 경우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도리에 늘 민감한 것입니다. 사기꾼의 협박과 공갈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의 고발에 의해 사기꾼이 구속되었다면, 믿지 않는 피해자의 경우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으로서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믿지 않는 사람은 상대의 허물을 질책하느라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눈먼 반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허물 속에서 더 큰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질책의 동기뿐만 아니라 방법과 과정 또한 믿지 않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 온갖 불의와 범죄가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곳곳으로부터 비난과 질책의 소리가 들끓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누구보다도 앞장 서 세상을 질타하고 있지만, 세상은 전혀 미동도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세상을 향한 질책과 꾸짖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수전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전절이란 닦을 수큰집 전그리고 때 절자로 이루어진 단어로 문자 그대로 성전을 수리하고 단장하는 것을 기리는 절기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날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것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보수된 성전 그 자체를 축하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음은 마태복음 241-2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압도당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전절을 맞이할 때마다 그토록 찬탄해 마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을 송주리째 없애 버리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주후 70,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수전절의 의미는 무엇이며, 바로 그 날 예루살렘 선전에 계신 까닭은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전은 그 삶이 성전이어야할 우리 자신을 의미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던 것은 건물 자체를 기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 건물에만 심취하여 그 삶이 전혀 거룩한 성전이 되지 못한 유대인들을 문자 그대로 수전, 수리하고 개조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025-26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렸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질책이었습니다. 아무리 일깨워 주셔도 도무지 알려하지 않을 때,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주님의 양이 아니라고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는 아예 힘으로 쫒아내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찌 그런 언행을 하실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참된 사랑이요, 책임있는 사랑이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질책할 수밖에 없는 추악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들을 질책하고 꾸짖으시기 전에 자신을 먼저 거룩한 성전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책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질책이 아니었던들, 주님의 매가 아니었던들, 주님께서 우리의 죽은 양심을 뒤흔들어 주시지 않았던들, 주님께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 마음속의 온갖 악함을 몰아내어 주시지 않았던들, 어찌 우리가 오늘 이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 주님을 본받아, 죄악에 눈멀고 불의에 멍든 이 사회를 꾸짖어 바로 세우기 위해 먼저 우리가 진리 즉 말씀 안에 거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한 성전으로 가꾸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빛이요, 소금일 수 있습니다.

 

모 교단이 총회 회관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났음에도 공사대금을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차일피일 시간만 끌자 화가 난 건설회사 직원들이 나흘 동안 회관을 점령하고 격렬한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 교단은 즉각 교단 산하의 모든 언론매체를 총동원하여 난동을 부린 건설 회사를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질책일 수 없습니다. 그들을 질책하기 전에 먼저 공사비를 제대로 지급해야 합니다. 공사비가 없으면 애당초 공사를 시작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세우지 않고 남을 질책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질책으로는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뜻깊은 5월을 우리 자신을 위한 수전절로 삼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고치고, 개조하고, 닦아냅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스스로 온전한 하나님 말씀의 성전이 됩시다.

그리고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질책하고 꾸짖는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 때 우리 자신과 우리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참된 생명, 책임있는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祈禱)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새 봄 5월을, 우리 자신을 수리하고 개조하는 수전절로 삼게 해 주옵소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닦고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끔 우리 자신을 개조할 수 있게,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우리의 질책을 통로로 삼아, 하나님께서 친히 이 사회를 바로 세우심을 똑똑히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 곧 나 자신인 것을, 일평생 기억하며 우리 삶으로 실천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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